본문 바로가기

번역

티머시 모턴. 「퀴어 생태학」

알려두기

1. 이 글의 원문은 Cambridge University Press에서 발행하는 『PMLA(Publications of the Modern Language Association)』 Vol. 125, No. 2 (March 2010), pp. 273-282 (10 pages)에 수록된 Timothy Morton의 「Queer Ecology」입니다.

2. 티머시 모턴이 인용한 책이나 논문이 한국에서 출간되었을 경우 한국어 번역본을 병기했습니다. 그러나 판본을 대조하지 않았으므로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3. 본문과 주석을 포함해 이 글에서 역자가 설명을 덧붙일 경우 대괄호[ ]를 사용했습니다.

4. 저자가 강조의 의미로 사용한 이탤릭체는 밑줄로 표시했습니다.

5. 번역과 맞춤법에 관련된 피드백은 댓글에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호흡보다 가깝고 손발보다 근처에 있다
조지 모리슨George Morrison, 「다시 깨어나는 신비주의The Reawakening of Mysticism」

 

 

생태학적 비평과 퀴어 이론은 양립가능할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만나면 환상적인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삐딱하고 프랑켄슈타인 같은 밈을 잇는 데 성공할 수 있을까? 나는 퀴어 생태학이라는 꽤나 존재하지 않는 분야를 위한 몇몇 가설적 방법과 프레임워크를 제안할 것이다. (카트리오나 샌딜랜드Catriona Sandilands, 그레타 고드Greta Gaard 그리고 『언더커렌츠Undercurrents』 저널의 선구적인 작업은 여기서 [그 업적을] 인정받아야 한다.)[각주:1] 이렇게 자만심을 내보이는 것은 [여러분의] 신경을 흥분시키고 화를 돋우지만 부탁하건대 이번 시험 비행에서는 나를 참아 주기 바란다. 기본에서 시작하자. 이 분야를 문학-비평적으로 뻔히 다른 두 가지를 비교하는 곳으로 만들지 말자. 고생하면서 토대(혹은 반토대)로부터 시작하자. 다른 조성key에서 퀴어 이론도 요구하듯이, 다른 존재들과의 친밀함을 요구하는 생태학의 이름 그 자체에서 시작해 보자. 우리의 시대가 이것을 요청하기 때문에 하자. 생물권에 거주하며 생물권을 구성하는 생명체를 지구의 여섯 번째 대멸종 중간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또 수동적으로 파괴하는 동안 우리는 자연Nature이 정말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환상과의 접촉을 상실하고 있다.(나는 자연을 대문자로 써서 덜 자연스럽게 만들었다.) 환상을 포기하는 것은 현실을 포기하는 것 보다 훨씬 더 어렵다.

2008년 크리스마스, 교황 베니딕트 16세는 열대우림이 우리의 “보호”를 받을 가치가 있다면 (“남성”과 “여성”으로 정의되는) “인간”도 그에 못지않게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인간 생태학 같은 게 필요합니다.” 그의 선언은 명시적으로 "젠더" 이론을 겨냥했다. 교황의 동성애혐오가 의존하는 역사와 자연의 그릇된 이분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학계는 퀴어적인 것이 단순히 문화사의 일시적인 오류blip가 아니라 생물학적 실체 속에 다양한 형태로 자리 잡은 방식을 연구해야 한다.[각주:2]

불행히도 많은 생태비평이 퀴어 생태학을 배양하기 유독한 환경을 제공한다. 에코페미니즘(전통적인 예로 캐롤린 머천트Carolyn Merchant의 『자연의 죽음The Death of Nature』이 있다)은 생물학적 본질주의와 결합된 여성주의적 분리주의에서 생겨났고, [생물학적 본질주의는] 전략적이든 아니든 이분법적 차이에 기반을 두고 있으므로 퀴어 이론의 탁월한 점인 일종의 차이 증식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미국의 많은 생태비평은 단호한 개인주의, 남근 권위주의적 숭고, (순수한 외모, 기표, 노출display처럼) 모든 형태의 여성성에 대한 알레르기를 포함한 다양한 남성성 밈으로 향하는 벡터다. 다른 환경주의(이를테면, 케이티 릭비Kate Rigby, 글렌 마지스Glen Mazis 등이 실천한 생태현상학)는 자연이 산물이 아니라 과정이라는 유연하고 경험적인 견해로 인해 더 유망하다. 그러나 나는 그게 그저 [에코페미니즘에서] 업그레이드된 것일 수 있기에 걱정된다.

 

독립과 친밀함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퀴어 생태학의 한 사례를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성애주의적heterosexist 젠더 수행이 "외부"에서 내부"를 분리하는 형이상학적 다양체를 생성하는 방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내부-외부 다양체는 환경을 형이상학적이고 닫힌 시스템 곧 자연으로 생각하기 위해 근본적인 것이다. 이것은 폭력 없이 해석할 수 없다. 메리 더글라스Mary Douglas의 『순수와 위험Purity and Danger』과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의 『공포의 권력Powers of Horror』을 사용하여 버틀러는 내부-외부 다양체가 절대 성공할 수 없는 젠더 식별 및 배제 의식을 유지한다는 것과 몸이 단지 불투과적인 닫힌 형태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Gender Trouble 133–34). 버틀러는 또한 "자연" 자체가 상호연관성의 생태학적 개념을 통해 철저히 수정된다고 주장한다(Bodies 4). 내가 다른 곳에서 주장했듯이 자연의 이데올로기는 이성애주의가 치안을 유지하는 그 경계와 유사한 내부-외부 구조에 기반한다(Ecology 19, 25, 40, 52–54, 63–64, 67, 78; “Ecologocentrism”). 모든 생명체는 그들이 구성하고 거주하는 환경과 마찬가지로 내부와 외부 사이의 경계를 모든 수준에서 거부한다. 우리가 환경을 조사할 때, 환경은 반짝거리며 그 형상은 "낯선 왜곡"[각주:3]으로 나타난다. 환경과 친밀해질 때—생태계적 공포와 과학적으로 측정 가능한 리스크를 가진 우리의 시대가 보여주듯이(Beck)—환경은 더 이상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그저 그런 일이 아니기 때문에 확실히 더 이상 환경이 아니다. 그게 바로 날씨와 기후의 차이다.

먼지와 오염을 배제함으로써 스스로를 정의하던 인간 사회. 우리는 이제 이 배제를 지지할 수 없고 또한 배제로 만들어내는 세상을 믿을 수도 없다. 이는 말 그대로 쓰레기가 어디로 가는지 깨닫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오염을 배제하는 것은 자연을 깨끗하고 야생적이고 즉각적이며 순수한 것처럼 공연하는 [방식의] 일부다. 주체와 객체를 갖추기 위해서는 토하거나 배설할 비체가 필수적이다(Kristeva). 비체의 억압을 통해 환경주의-나는 특정 운동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말하자면 이성애주의 혹은 인종차별주의와 [환경주의에] 친연성이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는 주관적 객관subject-object 다양체를 전복시키거나 화해시킨다고 주장하면서 새롭고 개선된 자연의 브랜드만을 생산할 뿐이다.

이것이 젠더 구성에서 전개되는 한 가지 방법은 많은 자연 관련 저작물을 강제로 뒤집어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환경주의적 문학 비평가들이 [자연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괴롭히기 좋아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칼 크로버Karl Kroeber는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중서부 뇌우 지역에 나가서 서 있어야 한다고 제안한다(42). 이 제안은 이제 거의 물고문처럼 고통스러워 보인다. 한 평론가는 아마존닷컴의 내 블로그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이 자연 없는 생태학을 용기있게 지지하는 데 필요한 것을 명시했다. "자연의 부재 또는 '생태학'의 편리한 버전에 대해 거만하게 주장하려는 모든 학자는 칼만 하나 주고 밥 마샬 야생지대에 떨어뜨린 다음 그 혹은 그녀가 [알아서] 살아나오게 해야 한다"(Robisch). (나는 지젝이 이런 중얼거림과 함께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상상한다. "나는 살아나왔다. 그러나 많은 동물과 식물이 있어도 자연을 찾지는 못했다.") 2009년 3월, 문학과환경연구회Association for the Study of Literature and the Environment의 이메일 목록 사이에 일어난 토론은 헨리 제임스를 환경 작가로 가르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Henry James”). 그의 은둔하는 인물들과 내향적인 산문을 근거로 제임스가 왜 환경 작가가 아닌지 그 예시로 가르칠 수 있다는 이의가 제기되었다. [후자의 주장에 따르면] 제임스와 그의 인물들에게 필요한 것은 충분한 호흡으로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이다. . . .

그러나 자연이라고 불리는 것이 정말로 배제를 통해 작동할 수 있을까? 퀴어 이론은 비본질주의적 생물학에 이상한 친구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우정은 어떤 모습일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인문주의자들은 수학과 과학 보충 수업이 필요하지만 그 과목을 겁낼 만한 이유는 거의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어쨌든 과학은 과학자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 중요하다. 생태학은 비본질주의적인 측면을 가진 생물학에서 비롯된다. 퀴어 이론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비본질적 견해다. 두 영역은 교차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어떤 점에서 그런 것일까?

이런 주장은 급진적이거나 수정주의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냥 다윈을 읽어라. 진화는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체들은 서로를 결정하는 중이다. 개체들은 서로 관련되어 존재하며 서로로부터 파생된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없으며 그 무엇도 무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DNA 수준에서는 바이러스 코드 삽입으로부터 "진정한" 코드 시퀀스를 구별하는 게 불가능하다. 예를 들어, 박테리아에는 바이러스 코드 조각과 다르지 않은 개체들, 플라스미드plasmids가 존재한다. 플라스미드는 박테리아 숙주의 기생충과 비슷하지만 이 규모에서는 어느 것이 기생충이고 어느 것이 숙주인지 구별할 수 없다. (Dawkins, Extended Phenotype 159, 200–23, 226; paging Hillis Miller . . . ). DNA는 말그대로 리보솜ribosomes이 효소를 제작하기 위해 RNA가 번역하는 코드다(그 마지막 결과가 생명체다). 리보솜은 DNA를 다르게 읽도록 프로그래밍 될 수 있다. 유전 공학은 박테리아 세포가 단백질 대신 플라스틱을 제작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다(생명과학에서 논란에 여지가 없는 몇 안 되는 영역을 확인하려면 <물질 세계Material World>를 봐라) 어떤 의미에서 분자 생물학은 텍스트 연구와 유사한 진정성 문제에 직면한다. 어쨌든 어떤 수준에서 해체가 진정한 텍스트는 없다고 보여주듯이, 생물학은 진정한 생명체가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것은 가능한 한 많은 수준과 규모에서 차이가 증가한다고 가정하는 퀴어 생태학 이론에 희소식이다.

『바이올로지Virology』 저널에 실린 다음 사례를 고려하라. ERV-3(인간 내인성 레트로바이러스 3)는 태반장벽의 면역억제적 특성을 강화하는 단백질을 코드화 할 수 있다(Boyd et al.). 당신의 유전자에 있는 바이러스가 어머니의 몸이 당신에게 알레르기를 일으키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개체는 구성 요소가 될 장치, 즉 신체 없는 기관을 결여한다.[각주:4] 리노바이러스 DNA가 자신이 전파되기 위해서 재채기를 직접 코드화했기 때문에 우리가 재채기를 할 수 있는 걸까?(Dawkins, Extended Phenotype 200–03, 226) DNA 수준에서 생물권은 투과적이며 경계가 없다. "생물권의 전체 유전자 풀pool은 모든 유기체가 사용할 수 있다"(qtd. In Dawkins, Extended Phenotype 160). 그러나 우리에게는 팔, 다리 등이 달린 몸이 있으며 또 모든 종류의 생명체가 허둥거리는 모습을 자주 본다. 생명은 자연스럽지 않다. 말하자면 생명1.0 Life1.0이다(Žižek, In Defense 440). 오히려 삶은 유기적이고 일관성있거나 권위적인 게 아니라 파국적이고 괴물 같으며 비전체론적이면서 탈구되어있다. 생태학적 비평을 퀴어링하는 작업은 이러한 특질을 다루는 것과 관련있다.

규모를 한 두 배 키워볼 때, 진화론은 종 사이와 내부의 견고한 경계를 파괴한다는 점에서 반본질주의적이다(Co hen; Darwin, Origin 34–35, 163; Dawkins, Ancestor's Tale 309–13, 569). 생명체는 유동적이다. 분리된 상태라고 상정하는 것은 마치 강물에 막대기를 넣고 "여기가 강의 X단계"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Quine). 퀴어 생태학은 이 유동적 삶을 상상하는 어휘가 필요하다. 나는 사실상 모든 수준에서 생명체가 종[과 종] 사이, 생물과 무생물 사이, 유기체와 환경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고 혼란스럽게 하는 비전체주의적 상호관련성이 제약 없이 연결된 그물망을 구성한다고 주장해보겠다.[각주:5] 이 그물망을 시각화하는 것은 어렵다. 그물망은 우리가 가진 상상력으로 묘사하는 게 불가능하고 도상학을 초월한다. 아마도 부정적 형상화는 무엇이 그물망이 아닌지 상상할 것이다. 그물망은 환경주의("생명의 그물")나 포스트모던 이론이 애정하는 많은 유기적 은유처럼 부드럽고 물렁하지 않다. 추정컨대 비계층적이기 때문에 "수목적인" 형태보다 선호되는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리좀과 같은 아이디어를 나는 생각하고 있다(Morton, Ecology 52–53, 107–09). 퀴어적 텍스트 형식은 "가능성, 간격, 겹침, 불협음과 공명음의 열린 그물망"을 제공할 수 있다(Sedgwick 8. Khalip도 참조하라). 유기적 명백성은 권위주의적 남성주의에 너무 자주 순응했기에 퀴어 생태학은 유기주의와 그 이데올로기적 효과를 철저히 추궁해야 한다.

섹슈얼리티는 어떤가? 생물다양성과 젠더다양성은 깊게 얽혀 있다(Roughgarden 306–07). 세포는 단세포 조상들처럼 또 임신 초기에 자궁벽에 붙은 주머니배처럼 무성생식한다. 식물과 동물은 양성애가 되기 전에 자웅동체이고 이성애가 되기 전에 양성애다. 식물의 대부분과 동물 중 절반의 수컷과 암컷은 함께 또는 차례로 자웅동체가 될 수 있으며 자웅동체는 수컷 또는 암컷이 될 수 있다. 많은 생명이 젠더를 끊임없이 바꾼다(27, 34–35). 통계적으로 상당한 비율(최소 10%)의 흰꼬리사슴은 간성이다(36). 자웅동체인 달팽이들은 애정을 가진 듯 얽혀 있다(Nuridsany 및 Pérennou; Darwin, Descent 303–04). 게다가 섹슈얼리티의 과정은 종 안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른 개체와 만나는 것은 식물에게 이익이 되지만 곤충과 새 같은 다른 종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진화 이야기는 다른 생명체와 협력하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이야기다. 꿀벌과 꽃은 서로에게 유익한 "일탈"을 통해 공진화한다(Darwin, Origin 76–79 및 Descent 257).

이성애 생식은 무성 분열의 바다에 뒤늦게 추가되었다(Dawkins, Ancestor’s Tale 626). 거대분자 복제자의 관점에서 볼 때 이성애는 그저 ("비싼" 플러그인보다) 괜찮은 선택지 중 하나로 보인다. (Dawkins, Extended Phenotype 160). 이들 분자의 '탈것(즉, 우리와 딱정벌레)'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안 된다. 수행으로서의 젠더는 진화적 "만족화"를 근거로 한다. 당신의 몸이 어떻게든 작동하면 당신은 몸을 유지할 수 있다(156, Roughgarden 26–27). 이것은 제약처럼 작용하는 반복 함수의 통제된 집합으로서 수행성에 대한 버틀러의 견해와 일치한다(Bodies 94–95). 이 정도로 DNA 그 자체는 수행적이다. 간단명료한straightforward 생물학과 퀴어 이론 사이에는 모순이 없다. 퀴어의 기념비를 원한다면 주위를 둘러봐라.

이것은 우리를 "동물에 대한 문제"라고 끔찍하게 불리는 것에 데려다 놓는다. (내가 이걸 들을 때 "유대인 문제"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생태학적 비평은 종차별주의가 성차별주의와 인종차별주의의 기초가 된다고 주장해 왔다(Wolfe). [여기에] 동성애혐오를 포함시키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생명체와 그들의 다양한 섹슈얼리티, 또 욕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퀴어 생태학에서의 모든 시도는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경계가 두텁고 역설적인 개체로 가득하다는 진화생물학의 교훈을 존중하는 동시에 생명체를 만끽하는 방법을 상상해야 한다. 생화학자 솔 슈피겔만Sol Spiegelman은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 단단하고 엄밀한 경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Dawkins, Ancestor's Tale 582-94). 이 문제는 단순히 의미론적인 게 아니다. RNA와 또 다른 복제자로 구성된 역설적인 "근본 생명preliving life"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건 아마도 슈피겔만이 주장했듯이 자가 복제하는 규산염 결정체일 것이다. 생물학은 살아 있는 유기체 형태로 스스로를 압출 성형하는 원형질에 대한 생기론적 환상을 폐지한다. 생기론은 유행에 뒤떨어진 것일 수 있지만 학계에서 부활하는 앙리 베르그송, 들뢰즈, 가타리가 그것을 연장시킨다. 사람들은 여전히 ​​습관적으로 현대 과학에 완강히 저항하면서 생물과 무생물의 경계가 팽팽한 동시에 가늘다고 가정한다. 테리 샤이보Terri Schiavo[사건]와 가이아 [이론] 같은 환경주의적 환상을 생각해 봐라. 바이러스는 세포가 스스로를 복제하도록 지시하는 거대분자 결정체다. 악마 옹호자가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는데 바이러스가 살아 있다면 컴퓨터 바이러스도 살아있다. 생명체 자체가 자연적인 것과 비자연적인 것 사이의 구별을 훼손한다. 데리다는 생물-무생물 경계에 해체가 작용된다는 가설을 세웠다(Of Grammatology 9와 Animal 104). 그들 사이의 강력한 유사성을 감안할 때, 데리다는 다윈에 대해 상세히 언급한 적도 없지만 마치 다윈이 데리다를 읽은 것처럼 보인다(Milburn). 그리고 퀴어 이론에 주어진 해체적 DNA를 고려하면 우리는 데리다를 통해 퀴어 생태학을 구축할 수도 있다.

퀴어 생태학은 동물이라는 형편없는 용어를 버리고 낯선 이방인 같은 걸 채택할 수 있다. 이건 데리다의 도착자arrivant에 대한 나의 미숙한 번역이다. 우리에게 다른 생명체는 낯섦이 줄어들지 않는 이방인, 즉 도착자는 도착을 예측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호스티피터빌리티Hostipitality"). 모든 것을 같음으로 축소시키는 대신, 생태학적 상호의존은 모든 곳에서 차이를 증가시킨다.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은 전혀 미스터리하지 않으며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기적적이다. 상호의존은 눈에 보이는 것보다 사물에 부족함less이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부족함은 우리가 결코 그런 존재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사실은 이것이 생명체가 존재하는 이유다.

퀴어 생태학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대해서도 걱정할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인간과 비인간을 적절히 구별할 수 있을까? 정체성이 보는 사람의 눈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그러한 구분에 심각한 제약을 가하지 않는가? 토끼가 이름만 토끼인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토끼를 부를 단어가 있든 없든, 모든 수준에서 의미signifying와 표시display가 발생하는 토끼는 완전히 해체적이다. 어떤 것도 자기동일성이 없다. 우리는 체현되었지만 거기에 본질은 없다. 유기주의는 전체적이고 실체적이며 탄소 기반 생명체(다른 뜻으로 유기물이 있다)를 생명의 본질처럼 시각화한다. 예를 들어, 퀴어 생태학은 탄소뿐만 아니라 규소silicon를 포용하기 위해 더 넓어져야 한다. DNA는 물질이자 정보다. 진정한 유물론은 비실체적일 것이다. 진정한 유물론은 물질을 정보가 직접적으로 새겨진 자기 배치적 상호관계의 집합으로 생각할 것이다. 삶의 생기론적 그물망을 가진 흔해 빠진 환경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유물론에서 벗어났다. 퀴어 생태학은 끝에 가서 존재가 정확히 어떻게 존재하는지 보여줄 것인데 왜냐하면 존재란 물질을 사랑하기 위한 깊은 관계성일 뿐 다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낯선 이방인은 섬뜩, 즉 친숙하며 동시에 낯설다. 이방인의 친숙함은 낯설고 이방인의 낯섦은 친숙하다. 폭력 없이는 그들을 어떤 계열series(예: 종이나 속)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독창성은 그들이 독립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다른 낯선 이방인들의 합성물이다. 모든 생명체는 우리가 생명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친숙하다. 우리는 생명체의 DNA, 세포 구조, 뇌 소프트웨어의 서브루틴을 공유한다. 생명체의 단일성은 집합체에 참여할 수 있는 생명체의 [수용]능력capacity을 의미한다. 퀴어 생태학은 거칠거나 혹은 그렇지 않은, 개인주의와 매우 다른 무언가를 지지할 수 있다.

커뮤니티는 [학계의] 호평을 받은 알도 레오폴드Aldo Leopold의 "생물적 커뮤니티" 개념에서 사례로 사용되는 전체론적 개념이다(225). 전체를 위해 부분은 죽게 버려질 수 있다. 결국 전체는 합보다 더 크다. 반대로 집합체는 의식적으로 공존coexistence을 선택했을 때 도출되는 결과다. 이 선택은 합산totalize할 수 없다. 집합체는 도착자를 호명하기 때문에 그녀, 그 또는 그것(우리가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겠는가?)이 불안하게 거기 있는 것과 같은 수준에서 집합체는 덧없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우리는 낯선 이방인의 어려움에 직면해야만 급진적인 생태 정치학을 달성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를 기독교 신학자 조지 모리슨이 쓴 글의 서문으로 이끈다. 생태적 공존은 “호흡보다 가깝고 손발보다 근처에 있다”(106[국역본 129쪽]). 말 그대로 피부 아래에 우리는 타자를 가지고 있다. 아니, 오히려 타자가 우리를 가지고 있다(Clark). 이것은 공생symbiosis에 관한 것이지만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반려종"이라고 부르는 것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생태학은 인간의 굴욕들 중에서 가장 최근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에서 마르크스, 다윈,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우리가 자율적 과정의 우주에 거주하는 탈중심화된 존재(Derrida, Animal 136)라는 것을 배운다. 생태학적 굴욕은 다른 존재들과의 정치적인 친밀감을 낳는다. 이 친밀감은 로또 용지straight box에 맞지 않는 다형적으로 왜곡된 소속감belonging (그리고 갈망longing)이다. 퀴어 이론은 섹슈얼리티가 병리학적 변종과 대조적으로 규범의 사례가 절대 될 수 없다고 주장할 때 친밀감을 잘 설명한다. 이러한 친밀함은 숙달보다는 나약함을, 전체론보다는 파편성을, 공격적인 단언보다는 해체적인 망설임에 대한 사유와 실천을 필요하게 만들며 차이를 증가시키고 실체화의 구체성을 통해 성장한다. 이게 삶이야, 짐Jim.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지.[각주:6]

 

강박적 자연에 반대하며

"환경적"으로 되는 것이 정신적, 성적, 사회적 친밀감에 대한 공포만 확대시킨다면 지구 온난화와 같은 현재의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더 큰 것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신 우리는 친밀하게 일해야 한다. 유기체론Organicism 은 생태적이지 않다. 유기적 형태에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 많은 환경주의는 -시스템 이론은 훨씬- 유기체적이다. 즉, 세계는 마음에 부합하고 마음은 세계에 부합하다는 것이다. 이 교차대구법에 내포된 목적론은 동화될 수 없는 차이에 적대적이다. 상호의존은 합산할 수 없는 차이를 시사한다. 상호연결된 생명체의 그물망은 세계를 구성하지 않는다. 세계들에는 여기와 저기, 내부와 외부와 같은 지평이 있다. 퀴어 생태학은 세계들을 약화시킬 것이다. 배태성embeddedness의 적나라한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생태현상학은 불완전한 존재적 수준의 굴욕적인 결핍에 저항한다. 폭력적인 망각 없이는 어떠한 존재론도 불가능하다. 폭력 없는 형이상학으로는 형이상학과 싸울 수 없다. 퀴어 생태학은 섹슈얼리티에 대한 심오하고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 이러한 근본적인 불완전성을 탐구할 것이다. 생명체의 그물망은 유기체론의 대안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자연의 새롭고 개선된 버전을 찾는 것이 될 테다.

유기제론은 성차를 자연화함으로써 제멋대로 퍼져나가고 얽혀 있으며 퀴어한 그물망을 통제한다. 이는 생명 과학의 발견과 모순된다. 생물학자인 조안 러프가든Joan Roughgarden은 젠더 다양성이 진화의 필연적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더욱이 그녀의 주장은 다윈 자신이 젠더 다양성을 위한 여지를 열어놓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엄격한 다윈주의는 퀴어 생태학에 러프가든보다 더 우호적일 수도 있는데, 왜냐하면 다윈주의가 너무 반목적론적이기 때문이다(마르크스는 이런 이유로 다윈주의를 좋아했다). 러프가든은 도마뱀, 새, 양, 원숭이 및 보노보에 있는 동성애의 존재를 정당화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목적론적 식사meal를 만든다(145). 개인과 종은 자신의 형태를 보존하기 위해 추상적으로 “욕망”하지 않는다. 오직 고분자 복제자만이 그것을 "욕망”한다. 복제자의 관점에서, 만약 그게 작동하면(앞서 언급한 "만족화"가 말이다) 당신은 형태를 유지할 수 있다(Dawkins, Extended Phenotype 156; Roughgarden 26–27). 젠더와 섹스 수행의 풍성함이 발생할 수 있다. 진화가 진행되는 한, 복제자들은 그런 방식대로 머무를 수 있다. 다르게 생각하면 "적응주의"다.

반본질주의적 수행성을 원하는가? 다시 말하지만 그냥 다윈을 읽어라. 성 선택의 동력원은 성적 과시이지 "적자생존"이 아니다. 알프레드 러셀 월러스Alfred Russel Wallace는 비실용적 결론을 경계하면서 다윈에게 그 골치 아픈 문구를 삽입하라고 촉구했다(Dawkins, Extended Phenotype 179–80). 성적 과시는 외모와 행동의 광범위한 부분을 설명한다. 내 외모의 일부(예를 들어, 나의 불그스름한 수염)에는 어떤 이유도 없다. 수백만 년 전에 누군가가 그저 이게 섹시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젠더에 대한 다윈의 견해에 수많은 비판에도 쏟아졌음에도(Grosz 72–79), 진보적인 에너지가 남아 있다. 다윈이 섹슈얼리티를 순전한 미학적 과시(하위-칸트적 목적없음 sub-Kantian purposelessness)로 축소시켰기 때문에 『인간의 유래』는 반인종주의만큼이나 반동성애혐오적이다(Grosz 87).[각주:7] 이는 표층의 즐거움이 "실제" 활동과 대조된다는 의견을 교환하기 거부한다.

욕망은 전체론적 소속감보다 낯선 사람과의 친밀감을 중요시하는 생태학에서 피할 수 없다. 그러나 환경주의는 욕망의 우연성에 초연하려고 애쓴다. 따라서 자연을 사랑하는 것은 남성적 이성애정상성, 즉 수행 흔적을 지우는 수행의 노예가 된다. 그린캠핑의 슬로건처럼 "흔적을 남기지 말라"고 한다. 남성성은 수행을 수행하지 않는다. 당신이 남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당신은 남성적이지 않다. 남성성은 자연스럽다. 자연은 남성적이다. 거칠고 황량하며 남성적인 자연은 대조를 통해 스스로를 정의한다. [예를 들어] 야외활동을 좋아하고 외향적이며 이성애적인 한편 장애를 가지지 않은 사람으로 말이다. [여기서] 장애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즉, 신체적 완전함과 [신체]협응을 자발성보다 높이 평가한다(McRuer, Mitchell 및 Snyder). 자연은 공격적으로 건강하며 자기 도취에는 적대적이다. 대자연Mother Nature이 가진 탄압받는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자연은 여성적이지 않다. 거기에는 피상적인 것 이상의 아이러니나 모호함이 설 자리는 없다. 어쩌면 혐오감을 가진 다정한 유형을 제외하고는 유머를 위한 공간이 부족하다.

남성적 자연은 외모에 알레르기가 있다.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하기에 헤겔Hegel이 세계의 밤이라고 불렀던 그 위협적으로 공허한 주체성의 차원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한다(204). 남성적 자연은 여성적이고 “단순한” 외모가 가진 없음nothingness을 두려워한다(Levinas 158). 생태 현상은 이 무한한 낯섦을 보여준다(170). 그와 대조적으로 남성적 자연은 “비왜곡unperversion”이다. 유기주의는 욕망을 말소로, 말소-욕망으로 설명한다. 유기주의는 욕망이 없어진 "손 닿지 않은" 자연을 원한다. 유기주의는 욕망을 말소시키는데 왜냐하면 "순결virginity"에 대한 유기주의의 관심은 사실 욕망이기 때문이다. 흔적 없는unmarked 자연은 배제에 의해, 그리고 배제의 배제에 의해 성립한다.

퀴어 생태학은 상호연결이 유기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가 상호연결과 유기주의를 진화적 또는 지질학적 시간 연대 위에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들은 마치 호응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만약 당신이 마비된 귀뚜라미를 마비시킨 조롱박벌이 만든 구멍에서 가져오면 (그리고 말벌 유충이 있는지 검사 중이라면), 그 말벌은 귀뚜라미를 유인하지 않고 아무 의미 없이 되가져올 것이다(Hofstadter 360–61, 613-14). 말벌은 구멍이나 음식에 대한 플라톤 사상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저] 유인하고 귀뚜라미의 새끼를 찾는 행동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자연(저쪽 산 너머나 우리 DNA나 어디서든 구체화된 신화적인 것)은 우리가 그것을 직접 볼 때 녹아내린다(다이애나 여신을 직접 바라보는 금기를 어기면 끔찍한 변신의 결과가 수반된다는 점을 기억하라). 자연은 마치 언데드처럼 계속 돌고 돌고 돌아서, 또 우리가 계속해서 시선을 돌리고 틀을 잡고 평가하기 때문에 자연스러워 보인다. 상호연결된 생명체의 좀비 같은 특징을 인정하는 것은 자연에 대한 이념적 집착에서 완전히 퀴어 생태학으로의 전환을 도울 것이다. 나는 이 과도기적 양상transitional mode을 "암흑 생태학dark ecology "이라고 부른다(Ecology 181-97). (심층 생태학에서와 같이) 깊이와 진정성에 대한 은유를 영속화하는 대신, 심오하면서도 아이러니한데 허무주의적이거나 유아론적이지 않은 그러나 느와르 영화의 등장 인물처럼 그녀 또는 그가 생명체에 얽히고 생명체와 얽히는 것에 대해 우리가 [등장 인물처럼] 인식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다.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을 생각해 봐라. 퀴어 생태학적 윤리는 사람이 아닌 경우에도 존재를 사람으로 간주할 수 있다.

모든 생태학적 위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어떻게 생태 이론이 감히 채식주의를 비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채식주의적 주장이 펼쳐지는 위치는 매혹적인 육식적 고기공포증, 폭력적인 비폭력 즉, 그 모든 고기, 그 모든 난도질 된 몸일 수 있다. 동물권의 언어에는 폭력적인 번역과 산산조각 내기가 포함될 수 있다(Hacking 168–70).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는 육류와 불공정하게 거래되는 향신료를 삼갈 것을 옹호했다. 그러나 그의 채식주의적 수사학은 광기를 범죄로, 범죄를 질병으로 동일시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다시 말해, 흔적 없는 사회, 사람 없는 사회를 갈망한다(Morton, Shelley 134-35).[각주:8]

존 크라카우어Jon Krakauer의 『인 투 더 와일드』(그리고 이 책으로 만든 숀 펜Sean Penn의 영화)는 남성적인 자연의 끔찍한 폭력을 열거한다. 크리스토퍼 맥캔들레스Christopher McCand는 덜 알렉산더 슈퍼트램프Alexander Supertramp스럽게 변했고 동성애적 그리스 제국주의와 디스코 서정성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남성적 자연에 대한 파멸적인 실험을 고려할 때 이상하다. 그는 알래스카 중심부에 있는 버려진 스쿨버스 집에서 유독성 식물을 먹고 죽기 직전에 다른 사람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슈퍼트램프의 위치는 그가 믿었던 것만큼 멀지 않았다. 그는 대피소에서 불과 몇 마일, 주요 고속도로에서는 약 15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다. 슈퍼트램프의 야생성에 대한 개념은 그의 생존 본능을 압도했다. 자살 충동을 느끼는 그런 젊은 남성들은 이 책을 따라하면 자신이 자연 속으로 사라진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들은 문명과 문명의 불만에서 도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문명의 죽음 본능을 연기한다. 그들은 통제와 질서에 대해 이렇게 환상을 품는다. "나 혼자 힘으로 할 수 있어"라고. "자연으로의 회귀"는 사랑, 온기, 취약성과 모호성을 삭제함으로 자수성가한 사람의 신화를 연출한다. 퀴어 생태학은 아름답지 않은 것, 멋지지 않은 것the uncold, "절름발이", 화려하지 않은 것을 시각화해야 한다(Levinas 192–93, 200).

나무 껴안기는 순전한 자연적 비수행성이 아니라 전적으로 에로티시즘의 한 형태다. 생태학의 불가해한 친밀함을 고찰하는 것은 몸이 어디에서 멈추고 시작하는지에 대한 이데올로기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이성애규범적이지도 생식기[중심]적이지도 않은 쾌락을 상상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신비주의가 생각하지 못한 물질성을 비축하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각주:9] 『성찬Sacrament』은 멸종하는 종을 증언하는데 집착하는 게이 사진 작가에 관한 클라이브 바커Clive Barker의 소설에 적합한 제목이다. 사진작가 윌Will은 지구의 모든 생명체가 그려진 신비한 벽화에 빠져든다.

 

그들이 더 깊은 모험을 할수록 그는 세상의 메아리가 아니라 세상 그 자체, 그의 영혼이 세상의 신비 속으로 지나가는 축복의 실을 밟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영양이 풀을 뜯는 평야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헐떡이는 개 한 무리와 함께 누워 있었다. 그는 개미들과 함께 행진했고 혹독한 둥지에서 일하며 알을 쌓는다. 그는 바우어새bower bird의 짝짓기 춤을 추고 도마뱀 친척과 함께 따뜻한 바위 위에서 잠을 잤다. 그는 구름이었다. 그는 구름의 그림자였다. 그는 구름 그림자를 드리운 달이었다. 그는 맹어blind fish였다. 그는 [물고기] 떼였다. 그는 고래였다. 그는 바다였다. 그는 그가 조사한 모든 것의 주인이었다. 그는 솔개 똥 속의 벌레였다. 그는 자신의 삶이 하루나 한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 슬퍼하지 않았다. 그는 누가 그를 만들었는지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것이 되기 원하지 않았다. 그는 기도하지 않았다. 그는 희망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있었다가 있었고 있었으며 그게 기쁨이었다.(574)

 

자아가 오싹해지는 친밀감의 키치한 분미물 속에서 바커의 돌연변이를 유발하는 언어는 진화와 공생symbiosis의 시간성, 공존과 공존하는 공존으로서 "기쁨"을 불러 일으킨다. 윌과 즐거움의 불안한 만남은 퀴어 리딩 행위다. 윌이 읽은 것처럼 벽화는 오르가즘적으로 삶에 "방문"하여 그를 흡수하고 "어떤 성애적 수동성an erotic passivity"을 요구한다(Khalip). 배경이 전경이 되면서 황홀한 느낌보다는 쿨한 미학적 사색에 필요한 거리를 지운다.

생태학적 읽기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순전한 관용을 넘어 다른 사람의 즐거움을 공개적으로 감상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친밀감 공포증은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Samuel Taylor Coleridge의 「노수부의 노래Rime of the Ancient Mariner」에 퍼져 있다. “나는 노수부가 두렵다!/나는 당신의 마른 손이 두렵다!”(4.224–25) 이 시는 이야기하고 걷는 책의 형태로 된 다른 사람으로서의 텍스트, 그리고 “살아가는” 천한 벌레, “수 천 개의 끈적끈적한 것”과의 친밀감을 필요로 한다(239-40). 낯선 이방인을 의인화하는 여성적 삶과 죽음Life-in-Death의 소름끼치는 취약성보다 이 공포증을 더 자극하는 것은 없다.[각주:10] 생태 정치와 시학은 항알레르기적이다.

이것을 학부생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흠, 헨리 제임스는 녹색이면서 분홍색인가? 그 모든 화려하고 방대하고 몰입감 있는 단락과 깊이 없는(훨씬 깊었나 아니면 얕았나?) 내면성과 내면은 반환경적인가? 그들은 자연과의 교감 실패를 배신하는가? 아니면 그들의 "퇴폐성", 그들의 퀴어성, 비축된 유토피아적 에너지 즉, 압도적이고 거의 참을 수 없는 친밀감을 전달하기 때문에 읽기나 쓰기를 중단하고 밖으로 나가라는 일반적인 명령보다 이상하리만치 더 녹색을 띨 수 있는 에너지인가?

생태학과 퀴어 이론은 밀접하다. 외부에서 퀴어 이론을 주입한다고 생태학적 사고가 득을 얻는 게 아니다. 완전하고 적절하게 생태학은 퀴어 이론이고 퀴어 이론은 생태학이다. 곧 퀴어 생태학인 것이다.

 

 

참조 문헌

Barker, Clive. Sacrament. London: Harper, 1996. Print.

Beck, Ulrich. Risk Society: Towards a New Modernity. Trans. Mark Ritter. London: Sage, 1992. Print. [울리히 벡. 『위험사회- 새로운 근대(성)을 향하여』(홍성태 옮김, 새물결, 2006)]

Benedict XVI. “Papal Address: Key Extracts.” BBC. BBC, 23 Dec. 2008. Web. 2 Nov. 2009. [http://news.bbc.co.uk/2/hi/europe/7796970.stm]

Boyd, Mark T., et al. “The Human Endogenous Retrovirus ERV-3 Is Upregulated in Differentiating Placental Trophoblast Cells.” Virology 196.2 (1993): 905–09. Print.

Butler, Judith. Bodies That Matter: On the Discursive Limits of “Sex.” New York: Routledge, 1993. Print.[주디스 버틀러.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김윤상 옮김, 인간사랑, 2003)]

———. Gender Trouble: Feminism and the Subversion of Identity. New York: Routledge, 1990. Print.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 페미니즘과 정체성의 전복』(조현준 옮김, 문학동네, 2008)

Clark, J. Michael. “Sex, Earth, and Death in Gay Theology.” Queer Nature 33–39.

Cohen, J. “The Evolution of a Great Mind: The Life and Work of Darwin.” Lancet 367.9512 (2006): 721–22. Print.

Coleridge, Samuel Taylor. The Rime of the Ancient Mariner. Coleridge’s Poetry and Prose. Ed. Nicholas Halmi, Paul Magnuson, and Raimona Modiano. New York: Norton, 2004. 58–99. Print.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 『노수부의 노래』(이정호 옮김, 창조문예사, 2008)]

Darwin, Charles. 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 Introd. James Moore and Adrian Desmond. Harmondsworth: Penguin, 2004. Print.[찰스 로버트 다윈. 『인간의 기원1, 2』(추한호 옮김, 동서문화사, 2018)]

———. The Origin of Species. Ed. Gillian Beer. Oxford: Oxford UP, 1996. Print.[찰스 로버트 다윈. 『종의 기원』(장대익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9)

Dawkins, Richard. The Ancestor’s Tale: A Pilgrimage to the Dawn of Life. London: Phoenix, 2005. Print.[리처드 도킨스, 옌 웡. 『조상 이야기-생명의 기원을 찾아서』(이한음 옮김, 까치, 2018)]

———. The Extended Phenotype: The Long Reach of the Gene. Oxford: Oxford UP, 1999. Print.[리처드 도킨스. 『확장된 표현형-이기적 유전자, 그 다음 이야기』(홍영남, 장대익, 권오현 옮김, 을유문화사, 2016)]

Deleuze, Gilles, and Félix Guattari. Anti-Oedipus: Capitalism and Schizophrenia. Trans. Robert Hurley, Mark Seem, and H. Lane. Minneapolis: U of Minnesota P, 1983. Print.[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안티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분열증(김재인 옮김, 민음사, 2014)]

Derrida, Jacques.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 Ed. Marie-Louise Mallet. Trans. David Wills. New York: Fordham UP, 2008. Print.

———.“Hostipitality.” Acts of Religion. Ed., trans., and introd. Gil Anidjar. London: Routledge, 2002. 356–420. Print.

———. Of Grammatology. Trans. Gayatri Chakravorty Spivak. Baltimore: Johns Hopkins UP, 1987. Print. Gaard, Greta. “Toward a Queer Ecofeminism.” Hypatia 12.1 (1997): 114–37. Print.[자크 데리다. 『그라마톨로지』(김성도 옮김, 민음사, 2010)]

Grosz, Elizabeth. The Nick of Time: Politics, Evolution, and the Untimely. Durham: Duke UP, 2004. Print.

Hacking, Ian. “Conclusion: Deflections.” Philosophy and Animal Life. By Stanley Cavell, Cora Diamond, John McDowell, Hacking, and Cary Wolfe. New York: Columbia UP, 2008. 139–72. Print.

Haraway, Donna. When Species Meet. Minneapolis: U of Minnesota P, 2007. Print.

Hegel, Georg Wilhelm Friedrich. “Jenaer Realphilosophie.” Frühe politische Systeme. Ed. Gerhard Göhler. Frankfurt am Main: Ullstein, 1974. 201–89. Print.[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헤겔 예나 시기 정신철학』(서정혁 옮김, 이제이북스, 2006) 혹은 『예나 체계기획 Ⅲ』(서정혁 옮김, 아카넷, 2012)]

“Henry James.” ASLE Archives. Interversity: A Bureaucracy-Free Zone. Assn. for the Study of Lit. and the Environment, 25 Feb.–5 Mar. 2009. Web. 16 Feb. 2010.

Hofstadter, Douglas. Gödel, Escher, Bach: An Eternal Golden Braid. New York: Basic, 1999. Print.[더글러스 호프스태터. 『괴델, 에셔, 바흐-영원한 황금 노끈』(박여성, 안병서 옮김, 까치, 2017)]

Kant, Immanuel. Critique of Judgment. Trans. Werner S. Pluhar. Indianapolis: Hackett, 1987. Print.[임마누엘 칸트. 『판단력비판』(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Khalip, Jacques. “The Archaeology of Sound: Derek Jarman’s Blue and Queer Audiovisuality in the Time of AIDS.” Differences, forthcoming.

Krakauer, Jon. Into the Wild. New York: Anchor, 2007. Print.[존 크라카우어. 『야생 속으로 - 홀로 그 땅을 걸어』(이순영 옮김, 리리, 2019)]

Kristeva, Julia. Powers of Horror: An Essay on Abjection. Trans. Leon S. Roudiez. New York: Columbia UP, 1982. Print.[줄리아 크리스테바. 『공포의 권력』(서민원 옮김, 동문선, 2001)]

Kroeber, Karl. Ecological Literary Criticism: Romantic Imagining and the Biology of Mind. New York: Columbia UP, 1994. Print.

Leopold, Aldo. A Sand County Almanac, and Sketches Here and There. Introd. Robert Finch. Oxford: Oxford UP, 1989. Print.[알도 레오폴드. 『모래 군의 열두 달 - 그리고 이곳 저곳의 스케치』(송명규 옮김, 따님, 2000)]

Levinas, Emmanuel.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Duquesne UP, 1969. Print.[에마누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 외재성에 대한 에세이』 (김도형, 문성원, 손영창 옮김, 그린비, 2018)]

Material World. BBC, 12 Mar. 2009. Web. 2 Nov. 2009.

Mazis, Glen. Humans, Animals, Machines: Blurring Boundaries. Albany: State U of New York P, 2008. Print.

McRuer, Robert. “Compulsory Able-Bodiedness and Queer/Disabled Existence.” The Disability Studies Reader. Ed. Lennard Davis. New York: Routledge, 2006. 301–08. Print.

Merchant, Carolyn. The Death of Nature: Women, Ecology, and the Scientific Revolution. San Francisco: Harper, 1980. Print.[캐롤린 머천트. 『자연의 죽음-여성과 생태학, 그리고 과학혁명』(전규찬 옮김, 미토, 2005]

Milburn, Colin. “Monsters in Eden: Darwin and Derrida.” Modern Language Notes 118.3 (2003): 603–21. Print.

Mitchell, David, and Sharon Snyder. “Narrative Prosthesis and the Materiality of Metaphor.” The Disability Studies Reader. Ed. Lennard Davis. New York: Routledge, 2006. 205–16. Print.

Morrison, George H. “The Reawakening of Mysticism.” The Weaving of Glory. Grand Rapids: Kregel, 1994. 103–11. Print.[조지 모리슨. 「다시 깨어나는 신비주의」,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윤종석 옮김, 두란노, 2009, 129쪽]

Mortimer-Sandilands, Catriona (see also Sandilands, Catriona). “Unnatural Passions? Notes toward a Queer Ecology.” Invisible Culture 9 (2005): n. pag. Web. 2 Nov. 2009.

Morton, Timothy. “The Dark Ecology of Elegy.” The Oxford Handbook of the Elegy. Ed. Karen Weisman. Oxford: Oxford UP, 2010. 251–71. Print.

———. The Ecological Thought. Cambridge: Harvard UP, 2010. Print.

———. “Ecologocentrism: Unworking Animals.” Substance 37.3 (2008): 37–61. Print.

———. Ecology without Nature: Rethinking Environmental Aesthetics. Cambridge: Harvard UP, 2007. Print.

———. Shelley and the Revolution in Taste: The Body and the Natural World. Cambridge: Cambridge UP, 2006. Print.

Nuridsany, Claude, and Marie Pérennou, dirs. Microcosmos: Le peuple de l’herbe. Agencie Jules Verne, 1997. Film.[클로드 누리드사니, 마리 페렌노우. <마이크로코스모스>(1996)]

Penn, Sean, dir. Into the Wild. Paramount Vantage, 2007. Film.[숀 펜. <인투 더 와일드>(2007)]

Queer Nature. Spec. issue of Undercurrents 6 (1994): 1–44. Print.

Quine, W. V. “Identity, Ostension, and Hypostasis.” Journal of Philosophy 47.22 (1950): 621–33. Print.

Rigby, Kate. “Earth, World, Text: On the (Im)Possibility of Ecopoiesis.” New Literary History 35.3 (2004): 427–42. Print.

Robisch, Sean K. Online posting. Timothy Morton’s Amazon Blog. N.p., 30 Dec. 2008. Web. 2 Nov. 2009.

Romantic Circles Blog. U of Maryland, n.d. Web. 25 Nov. 2009.

Roughgarden, Joan. Evolution’s Rainbow: Diversity, Gender, and Sexuality in Nature and People. Berkeley: U of California P, 2004. Print. [조안 러프가든. 『진화의 무지개 - 자연과 인간의 다양성, 젠더와 섹슈얼리티』(노태복 옮김, 뿌리와이파리, 2010)]

Sandilands, Catriona (see also Mortimer-Sandilands, Catriona). “Lavender’s Green? Some Thoughts on Queer(y) ing Environmental Politics.” Queer Nature 20–24.

Sedgwick, Eve Kosofsky. “Queer and Now.” Tendencies. Durham: Duke UP, 1993. 1–22. Print.

Shelley, Percy Bysshe. The Triumph of Life. Shelley’s Poetry and Prose. Ed. Donald H. Reiman and Neil Fraistat. New York: Norton, 2002. 481–500. Print.

Taussig, Michael. Shamanism, Colonialism, and the Wild Man: A Study in Terror and Healing. Chicago: U of Chicago P, 1991. Print.

Wolfe, Cary. Animal Rites: American Culture, the Discourse of Species, and Posthumanist Theory. Chicago: U of Chicago P, 2003. Print.

Žižek, Slavoj. In Defense of Lost Causes. London: Verso, 2008. Print.[슬라보예 지젝.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박정수 옮김, 그린비, 2009)]

———. Organs without Bodies: Deleuze and Consequences. New York: Routledge, 2003. Print.[슬라보예 지젝. 『신체 없는 기관-들뢰즈와 결과들』(이성민, 김지훈, 박제철 옮김, 도서출판b, 2006)]



  1. Mortimer-Sandilands; Sandilands; Queer Nature. [본문으로]
  2. 그렇게 함으로써, 내 주장은 국립공원이 이성애주의적 미학에 따라 건설된다는 샌딜랜드Sandilands의 주장과 같이 문화적 유물에 대한 퀴어한 설명을 강조한다.(Mortimer-Sandilands; Sandilands) [본문으로]
  3. "낯선 왜곡"은 쉘리Shelley가 나무 뿌리에서 온 것 같다는 루소의 출현에 대한 그의 시 「생명의 승리The Triumph of Life」의 한 구절이다(183행). [본문으로]
  4. 나는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기관 없는 신체"에 대한 생각, 즉 마음의 다채로운 유물론적 이미지에서 이 문구를 인용했다(1-8). 도킨스의 『확장된 표현헝Extented Phenotype』 p.159를 참조하라. 다른 맥락에서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와 지젝Žižek은 둘 다 체셔 고양이Cheshire Cat[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신비한 고양이]의 미소를 비슷한 효과로 사용했다(Dawkins, Extended Phenotype 223; Žižek, Organs). [본문으로]
  5. 나는 『생태학적 사상The Ecological Thought』에서 이것을 계속 논의한다. [본문으로]
  6. [밴드 더 펌The Firm의 노래 <스타 트레킹Star Trekkin'> 가사 중 일부다.] [본문으로]
  7. "하위-칸트적"이라는 것은 미적 감상이 "상위" 인지 기능이 아님을 의미한다. [본문으로]
  8. 쉘리는 「고독한 영혼 알라스터」에서 이 집착을 스스로 해부했다.(Morton, “Dark Ecology”). [본문으로]
  9. 마이클 타우시스Michael Taussig는 남미 샤머니즘에서 이를 탐구했다. [본문으로]
  10. 추가적인 논의는 로맨틱 서클 블로그Romantic Circles Blog에 올라간 내 게시물을 참조하라.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