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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블래스. 「퀴어성, 개방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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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글의 원문은 『Leper Creativity: Cyclonopedia Symposium』(punctum books, 2012)에 수록된 Zach Blas의 「Queerness, Openness」입니다. 여기서 원문을 다운받을 수 있습니다.

2. 잭 블래스가 인용한 책이 한국에서 출간되었을 경우 한국어 역본을 참조해 번역했으며 문장의 흐름에 따라 일부 변형해서 옮긴 것도 있습니다. 각주에도 원서 대신 한역본을 썼습니다.

3. 역자가 설명을 덧붙일 경우 '역자주'라고 표기했습니다. 그 외 모든 각주와 괄호는 저자의 것입니다.

4. 번역과 맞춤법에 관련된 피드백은 댓글에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퀴어 이론의 상태는 죽음과 삶 사이 어딘가에 있다. 1990년 캘리포니아 산타크루즈 대학의 컨퍼런스에서 테레사 드 로레티스Teresa de Lauretis가 이 용어를 만든 이후, 이론적 작업은 지난 15~20년 안에 빠르게 정점을 찍었다고-혹은 교착 상태에 도달했다고-주장되어 왔다. 사실, 드 로레티스는 그것들에 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퀴어’가 이미 여러 주류 기관과 설립체에 의해 장악되었다고 단언하며 겨우 3년만에 이 용어를 포기했다.

하지만 만약 퀴어 이론이 자신의 미래에 항상 개방성을 약속하고 고정되거나 한정될 수 없다는 것을 끊임없이 주장한다면, 매우 많은 사람들이 퀴어 이론의 유용성은 끝났다고 선언하거나 완전한 죽음을 확언할 때 퀴어 이론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이것에 대한 많은 생각, 제안 그리고 이견들이 있다. 몇몇은 퀴어 이론이 개방성의 약속을 결코 이행하지 못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이들은 퀴어 이론의 바로 그 개방성과 무정형성이 그것을 치명적으로 희석시켰다고 지적한다. 데이비드 러폴로David Ruffolo가 말하듯이 아마도 “퀴어 이론의 정점”[각주:1]에 관련된 문제는 퀴어 이론이 아직 충분히 개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2005년, 데이비드 엥(David Eng), 잭 할버스탬(Jack Halberstam), 호세 무뇨즈(José Muñoz)가 편집한 퀴어 연구의 무엇이 퀴어적인가?라는 제목의 『소셜 텍스트Social Text』가 발행되면서 새로운 방향, 새로운 개방성에 대한 요구를 듣기 시작했다. 그들의 서문은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같은 다양한 교차성에 치중하는 “갱신된 퀴어 연구”를 요구하며 퀴어에 대한 비판을 설정한다.[각주:2] 그러나 퀴어 이론은 여전히 논쟁적 수렁에 빠져있고 이제는 정체성 정치와 신유물론 어딘가에 있다. 애너매리 야고스(Anamarie Jagose) 같은 퀴어페미니즘 이론가는 퀴어 이론을 페미니즘 이론과 거기서 발현하는 정치적 투쟁의 담론과 관계 속에 유지하고 싶어하지만,[각주:3] 다른 이들은 이러한 초기 프레임에서 급진적으로 벗어나 주로 들뢰즈적 유물론으로 향한다. 2007년, 엘리자베스 그로스Elizabeth Grosz는 듀크 대학에서 열린 페미니즘 이론 워크숍에서 미래의 페미니즘에 대한 자신의 꿈으로 기조 연설을 했다. 이 강연에서 그녀는 인식론적인 것을 특권화하는 것은 물론이고 너무 엄격하게 정체성 정치와 주체에 초점을 맞추는 페미니즘 이론을 비판하며,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페미니즘의 개요를 서술했다. 그로스는 주체를 뛰어넘어 언어나 재현 이전에 존재하는 존재론적, 성차적, 태고적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페미니즘 이론을 이동시키며 그녀가 물질적 카오스라고 부르는 실재를 파헤치는 페미니즘을 제출했다. 그로스에게 이것은 확정되거나 한정되지 않고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닌 타자가 되게 하고 우리를 알아볼 수 없게 만드는 ⋯ 세계 그 자체인 타자성에 자신을 개방하는 과정”[각주:4] 속에서 확장하는 페미니즘이다. 새로운 페미니즘을 향한 그로스의 열망은 직후에 뒤이은 퀴어 이론, 유물론 그리고 비인간으로의 다양한 모험들과 공명한다. 2009년 데이비드 러폴로는 『포스트-퀴어 정치학Post-Queer Politics』에서 퀴어가 정점에 도달한 한편, 주체성과 퀴어/이성애정상성 이원론에서 벗어나 주체, 이성애정상성, 수행성 심지어 인간에 의존하지 않고 새로운 종류의 퀴어 이론을 만들 수 있는 들뢰즈Deleuze와 가타리Guattari의 과정, 되기 그리고 물질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퀴어 생태학에 관한 티머시 모턴(Timothy Morton)의 최근 작업은 계속해서 퀴어성에 비인간을 연결시키고 있지만,[각주:5] 마이클 오루크(Michael O’Rourke)야 말로 사변적 실재론의 다양한 맥락 및 분파와 교차하는 퀴어 이론에 새로운 방향을 가장 먼저 제시한다. 노린 기프니Noreen Giffney와 함께 쓴 『포스트-퀴어 정치학』의 서문에서 러폴로의 포스트-퀴어 정치학은 외부에 의한 개방 과정에 포함된 퀴어성을 드러내는 레자 네가레스타니Reza Negarestani의 다중정치polytics를 닮았다.

이 모든 것이 나에게 질문을 일으켰다. 왜 퀴어 이론을 『사이클로노피디아』에 대한 글 모음에 끌어들이는가? 이렇게 많은 면에서 네가레스타니의 글과 반대되는 작업물을 왜 가져오는가? 오루크가 분명히 지적하고 다른 사람들이 암시했듯이, 나는 『사이클로노피디아』에 퀴어성이 있다고, 퀴어 이론이 과거의 물결과 새로운 물결 사이를 계속 진동하면서 배우고 이득을 얻을 수 있는 퀴어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아마도 이것은 퀴어 이론의 정전이 된 것을 넘어 이미 급진적으로 개방된 퀴어성이고, 그런즉 퀴어라는 단어가 붙잡지 않고 붙잡지 못하며 표면화하지 않았지만 표면 바로 아래에 존재한다. 아마도 『사이클로노피디아』는 퀴어성에게 묻는 것일테다. 퀴어 혹은 페미니즘 맥락에서 네가레스타니가 “젠더들 사이의 대립은 인간중심주의적 우둔함”[각주:6]이라고 썼을 때, 그는 퀴어 이론에서 논란이 되는 페미니즘 이론 일부를 콕 집었다. 게일 루빈Gayle Rubin은 1984년 자신의 에세이 「성을 사유하기: 급진적 섹슈얼리티 정치 이론을 위한 노트Thinking Sex: Notes for a Radical Theory of the Politics of Sexuality」에서 페미니즘이 여성의 범주(혹은 젠더)를 사유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섹슈얼리티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녀가 쓰기를 “성은 계급, 인종, 종족, 젠더 관점으로 축소되거나 파악될 수 없다.”[각주:7]역사적으로 퀴어 이론은 젠더를 넘어 섹슈얼리티를 다루어 왔고 그래서 루빈과 같이 만약 네가레스타니가 젠더 바깥에서 섹슈얼리티-또는 『사이클로노피디아』의 경우 사랑-를 사유하기 원한다면 퀴어 이론은 피할 수 없는 교차점처럼 보인다.[각주:8]

이 글에서 나는 네가레스타니의 퀴어성을 실험하고 시험하고 싶다. 그렇게 『사이클로노피디아』의 퀴어성을 놀리고 역지반화하면서 퀴어성을 더 명확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는 구멍 콤플렉스와 은닉된 글쓰기, 부패 그리고 사랑을 발굴해서 이 작업을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정체성과 주체성에 초점을 맞추는 과거의 퀴어 이론적 작업을 뒤에 남겨두자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히려 퀴어성을 시험하면서 그것이 개방되고 늘어나고 폭을 넓힐 때도 여전히 다중정치적인 것에 존재하는지 보는 것이다. 특히 나는 『사이클로노피디아』에 퀴어성을 가져오지 않을 것이다. 퀴어성은 이미 거기에 있는 상태로 발굴되기를 기다리며 또한 우리가 『사이클로노피디아』에서 들은 것처럼 발굴은 마멸되며 엉망진창이되고 변하고 있다. 이 퀴어성은 발굴될 때 『사이클로노피디아』와 퀴어 이론과는 다를 것이다. 그것은 그 위를 포개거나 더 낫게는 두 가지 모두를 부패시키는 다른 종류의 퀴어성일 것이다. 우리는 『사이클로노피디아』가 우리에게 또 다른 퀴어성에 대한 추상적인 도표를 제공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오루크와 기프니가 기술했듯이 러폴로의 포스트-퀴어 정치학이 들뢰즈를 통한 퀴어성에게 도표를 제공하는 것처럼, 또 하미드 파르사니 박사Dr. Hamid Parsani가 악트의 십자가를 대담한 신성모독, 석유정치적 저류에 대한 도표로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사이클로노피디아』에서 퀴어성을 발굴하기

퀴어 이론과 사변적 실재론에 관한 마이클 오루크의 곧 발표될 글에서, 그는 우리에게 로렌 벌랜트Lauren Berlant와 마이클 워너Michael Warner의 「퀴어 이론이 우리에게 X에 대한 무엇을 가르쳐 주는가What Does Queer Theory Teach Us About X?」에서 가져온 귀중한 구절을 제공한다. 그들이 쓰기를, “퀴어 이론을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건 유용하지 않은데, 특히 대문자 퀴어 이론으로 정의된 것이 그렇다. 우리는 대부분이 이론이 아니라 지시문으로 연결된 것들을 퀴어 코멘터리가 더 정확하게 설명 못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퀴어 이론은 어떤 특정한 것의 이론이 아니며 정확한 서지 형태도 없다.”[각주:9]오루크, 벌랜트, 워너는 여기서 이론이나 어떤 것으로서의 퀴어성이 아니라 잠재적으로 어떤 것에나 적용될 수 있는 일종의 코멘터리, 읽기와 쓰기를 위한 모델로서 퀴어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익숙한 모델의 약어는 그저 “퀴어링”이다.

『사이클로노피디아』에서 우리는 읽기와 쓰기를 위한 모델 역시 제공받는다. 연구가 진행 중인 고고학자 파르사니는 “고고학이 은닉된 글쓰기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통해 미래 정치를 지배하는 21세기의 군사과학이 될 것”[각주:10]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고고학은 구멍난 ( )체 복합체를 통한 설정 구멍의 발굴로 이해될 수 있다.

구멍 콤플렉스는 “빈곤한 완전체”와 “엉망진창으로 구멍난 것”으로 지구를 파악하는 모델이다. 구멍 콤플렉스는 지구의 견고함을 전복시켜 그것을 역지반화 한다. 구멍 콤플렉스는 “어떤 ‘외부적인 것’이 내부에서 점진적으로 끈질기게 기어 들어오는 (또는 나오는?) 기이한 지대”[각주:11]다. 지구는 반란을 일으키는 난장으로 변했다. 지구의 고체성이 전복될 때 생기는 구멍은 다중정치적이다. 단단한 것과 텅빈 것이 뒤죽박죽 섞인 이 구멍들은 모순이며 변칙이자 물질적 분화다. 『사이클로노피디아』에서 구멍들은 석유와 서사 윤활유로 연결되어 있다. 설정 구멍을 통해 읽는 것은 서사 윤활유를 따라가는 것이다. 이 독서 행위는 구멍을 통해 표면에서 깊이로 이동한다. “왜냐하면 모든 표층의 비일관성 이면에는 지하의 일관성이 있기 때문이다.”[각주:12]이런 식으로 읽는 것은 전복 중인 토대를 역지반화한다. 네가레스타니는 이것을 은닉된 글쓰기, 우리에게 설정 구멍을 통해 읽으라고 요청하는 구멍 콤플렉스와의 공모 모델이라고 부른다.

퀴어 이론은 쓰기와 읽기에 비슷한 모델이 없는가? 퀴어 이론의 작동 방식은 안정적이고 정상적이며 수용되고 견고하게 변한 대상을 가져와서 불안정하게 만들고 그것의 구조를 드러내며 구멍을 노출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퀴어링이라고 했고 벌랜트와 워너가 퀴어 코멘터리라 부르는 것인데, 퀴어 코멘터리와 은닉된 글쓰기의 차이점은 이 구멍들을 통과하는 논리 또는 서사다. 불안정화를 겨냥한 퀴어 이론은 코멘터리의 대상이 무엇이든 보통 그것을 구성하는데 작동하는 이성애정상적 논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네가레스타니의 모델을 취하면 우리는 퀴어 이론의 구멍 콤플렉스가 퀴어링으로 구멍을 만들고 이 구멍들로 새나가며 관통하는 논리가 이성애정상적이라는 것을 노출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퀴어 이론의 지하적 일관성은 이성애정상성이다. 다만, 구멍 콤플렉스와 은닉된 글쓰기의 차이점은 구멍 난 창발의 패턴들이 한 번도 알려진 적 없다는 것이고, 왜냐하면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 어떤 논리에 따라 사물들이 서로에게 스며들기 때문이다.”[각주:13]『사이클로노피디아』의 구멍 콤플렉스는 언어, 정체성, 주체와 반드시 관련되지 않는 보다 근본적이고 물질적인 차이다. 이러한 종류의 물질적 차이와 이형들은 정확히 데이비드 러폴로와 엘리자베스 그로스 같은 이론가들이 퀴어와 페미니즘 맥락 속에 수립하려고 시도 중인 것이다. 줄줄 새는 구멍들은 무엇을 드러내는 중일까? 분명히 주체를 뛰어넘는 서사지만 퀴어 이론은 항상 그 서사를 이성애정상성으로 읽기 원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요소들로 이 논리의 이성애정상적 측면을 독해하는데 또 다른 퀴어 이론이 개방될 수 있을까?

고고학으로 돌아가는 것은 구멍에 주의하며 발굴한 유물을 바꾸는 발굴 과정이다. 우리가 유물을 은닉된 글의 일부로 취급한다면, “[유물의] 아래쪽 표층은 오로지 구조 [혹은 표층을] 왜곡하는 방식으로만 발굴할 수 있다.”[각주:14]은닉된 글의 일부로서 『사이클로노피디아』는 발굴될 때 우리에게 최소한 두 개의 외부화된 아래쪽 표층을 제공한다. 1)주체와 이성애규범성에서 벗어나는 퀴어성 모델. 또는 보다 추상적으로 말하자면 이 구멍들이 적어도 부분적으로 주체와 상관 관계가 없는 어떤 것으로 구성된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직시하는 비일관성과 불안정성을 읽기 위한 모델, 그리고 2)퀴어성과 같이 아래쪽 표면에 해당하는 『사이클로노피디아』 자체의 설정 구멍을 통해 읽는 모델, 즉 표면으로 올라오면 책을 다른 어떤 것으로 왜곡시킬-그리고 무엇이든 발굴되는-모델이다.

나는 이제 이 은닉된 글쓰기 모델을 사용하여 퀴어 유물을 두 가지 더 발굴하고 싶다: 부패와 사랑. 『사이클로노피디아』의 부패는 부정성, 재생산, 그리고 미래에 대한 우리 인간의 관계를 복잡하게 만드는 창조성을 소개한다. 네가레스타니는 감산하며 구축되는 "반창조론적 창조성"[각주:15]으로 부패를 묘사한다. 이러한 부패의 형성은 소위 "반사회적 전환"과 미래성에 대한 퀴어 이론 내부의 현재적 논쟁과 공명한다. 여기서 부패는 이러한 반사회적 퀴어 정치에서 사라진 유물론적 구성 요소인 것 같다. 퀴어 이론은 주장들이 근거하고 있는 바로 그 축들을 포함해서 이러한 주장들에 트러블을 일으키고 역지반화하기 위해 "타락의 윤리"[각주:16]인 부패 이론을 필요로 한다. 부패는 적어도 두 가지 측면에 있어 퀴어성과 관계가 있다. 1)퀴어 이론이 재생산과 미래성과 가진 관계를 부패시키고 또한 2)퀴어성이 항상 "분류학적 불확정성"[각주:17]상태에 있음을 드러낸다.

네가레스타니는 0으로 향하는 중첩된 내부성과 무한한 지속성에 대한 그의 개념을 통해 부패에 건축학적으로 접근한다. 부패하는 어떤 것은 자신의 내면을 외부화한다. 이것이 발생하면 원래 자신은 수축하고 작아지며 0 (또는 완전한 소멸)에 점점 더 가까워진다. 이것이 네가레스타니가 강렬한 부정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내부성을 외부화할 때 새롭게 노출된 내부성은 노출될 수 있는 다른 내부성을 갖는다. 네가레스타니는 중첩되며 외부화될 수 있는 이러한 수준의 내부성들을 언급한다. 이것은 계속되며 따라서 광범위한 긍정이 있는 것이다.

퀴어 이론의 반사회적 전환은 미래를 보장하는 이성애정상적, 재생산적 논리는 물론이고 섹스에서 나타나는 관계성을 둘러싼 논쟁이다.[각주:18]한편 리 에델만Lee Edelman은 그가 부르길, 아이의 숫자에 매달리는 미래의 이성애정상적 논리를 거부하고 따라서 그는 어떤 미래도 거부한다. 반면 잭 할버스탬은 리 에델만과 레오 베르사니Leo Bersani가 옹호하는 섹스에 대한 반사회적 경험과 미래에 대한 부정적 거부를 수용하지만, 에델만의 미래에 대한 절대적 거부를 형식주의적이고 비정치적이라고 언급한다. 오히려 할버스탬은 자본주의적이고 제국적인 미래를 거부하고 다른 미래를 원하는데 그건 일반적으로 백인 퀴어 남성 학계에 기인하는 배제, 특히 여성, 가정, 재생산 그리고 어린이에 발생하는 배제가 생기지 않는 미래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부패는 존재하고 지속된다. 부패는 재생산하지 않더라도 항상 생산하며 항상 미래를 제공하는 다른 종류의 부정성을 퀴어 이론에 공급한다. 이것은 영원히 0을 향해가는 "무한한 부패의 미적분학"[각주:19]. 퀴어 이론도 부정할 수 없는 미래다. 섹스하는 와중에도 반사회적이지 않고 썩어가는 관계성이 있고, 이성애정상적 재생산의 미래든 에델만의 퀴어 죽음 충동이든 할버스탬의 펑크 퀴어 미래든 모든 미래를 퇴화시키는 생산적인 부패의 미래가 있다. 퀴어 이론은 분명히 "창조 없이"[각주:20] 구축하는 과정에 호의적으로 반응할 것이지만, 이러한 "창조 없음"은 퀴어적 거부와 상상계들만으로 자격을 갖출 수 없다. 네가레스타니는 부패가 "권력이 작동되는 지반 자체를 역지반화한다"[각주:21]고 말한다. 여기에서 퀴어 이론이 의존하는 힘의 받침점-동일한 퀴어-이성애정상적 이원론-이 부드러워지고 외부화되고 변화한다. 부패는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모든 내부성을 외부화한다.”[각주:22] 부패는 항상 그곳에 불가피한 채 있으며, 자신의 미래와 미래-없음을 계획한 방법을 역지반화하기 때문에 퀴어 이론은 부패와 관계 맺어야만 한다.

부패는 퀴어 이론에서 미래가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방식을 방해하는 동시에 퀴어 이론의 개념적 장치와 "서지 형태"를 부패시킨다. 네가레스타니는 그의 에세이 「위장한 부드러움: 부패의 건축학과 정치학 입문Undercover Softness: An  Introduction to the Architecture and Politics of Decay」에서 말했듯이 "정치 시스템이-개념과 구체적 구조의 영역 양쪽 모두에 속한-형상물로 구성되어 있다면, 살아있는 종과 마찬가지로 부패 과정에 의해 야기되는 골치 아픈 기형들의 영향을 받는다.“[각주:23] 네가레스타니는 부패가 "다른 종의 부패하는 사체 속에서 또 다른 한 종의 생성 가능성"을 제공하고 그러한 부패 속에서 ​​"한 종은 점차적으로 다른 종과 연결된 형상의 위도를 맡는 방식으로 균일하게 또는 불균일하게 기형화될 수 있다"[각주:24]고 지적한다. 퀴어 이론의 부패 과정 중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부패의 변화량은 현재 얼마인가? 그것이 무엇으로부터 외부화되었나? 그것이 무엇을 외부화하는 중인가? 퀴어성 자신의 전환과 변형에 대한 모델로서 부패는 이러한 변화를 사유하는데 매우 유용해 보인다. 우리는 퀴어 이론의 창시 이후로 외부화된 중첩된 내부성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까? 그 이후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썩어버린 외부화의 오래된 변화량을 유지하는 게 가능할까?

부패와 마찬가지로 사랑도 『사이클로노피디아』에 풍부하게 있다. 전형적으로 이 책은 사랑에 대한 퀴어 이론적 논의와 비슷하게 사랑을 이성애정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것으로 보는 방식과 매우 비슷하게 읽는다. 네가레스타니는 사랑을 "폐쇄성"[각주:25], "건강의 끝"[각주:26], "탈출의 실패"[각주:27], "폭압적인 가능성"[각주:28]으로 언급한다. 로렌 벌랜트는 그녀의 에세이 「사랑, 퀴어한 감정Love, A Queer Feeling」에서 (퀴어링되지 않은)사랑을 함정에 빠뜨리는 일반적이고 반복적인 형식주의로 묘사한다. 그러나 퀴어 이론이 또 다른 사랑을 제공하는 것처럼 『사이클로노피디아』에는 ​​또 다른 사랑이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사이클로노피디아』는 외부에 보내는 연애편지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외부를 유혹하고 외부와 바람을 피우는 과정 중에 있다. 이것은 주체에게 "파국적으로 불쾌한"[각주:29] 일종의 사랑, 급진적인 개방성으로서 사랑이다. 벌랜트는 정상성을 "공포 장르"[각주:30]처럼 인용하지만, 퀴어 이론이 적절하게 다루지 않은 더 공포스러운 것이 있다. 퀴어 이론은 이런 사랑을 향해 아직도 서서히 개방하고 있다. 팀 딘Tim Dean의 『제한없는 친밀감Unlimited Intimacy』에서 게이 남성의 콘돔 없는 섹스 문화는 "바이러스와 어떻게 그걸 할 것인지 그 방법에 대한 실험을 포함하는 발명의 장"[각주:31]이라고 설명된다. 이것은 딘으로 하여금 개방성과 타자성의 윤리, 즉 낯선 사람과의 섹스와 난교를 환영하는 윤리를 주장하도록 이끈다. 네가레스타니에게 딘의 콘돔 없는 섹스에 대한 묘사는 급진적 개방성보다는 한쪽이 다른 쪽을 감당할 수 있다고 판단하는 계산적 개방성으로 간주될 수 있다. 감당가능성에 대한 결정은 바이러스와의 실험에 앞서 콘돔 없이 섹스하는 자가 내린다.

급진적 개방으로서의 사랑은 파르사니가 책을 선사한 여자 마법사에게-그/녀는 외부인가?-쓴 글 한 구절에서 가장 생생하게 위치한다. 파르사니가 "사랑은 불완전 연소"[각주:32]라고 말할 때 그는 사랑을 흐릿하게 만들며 만연하는 근본적인 물질적 변화로 정의하고 있으며 이것은 "확실한 해체"[각주:33]의 과정이다. 이것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타자성에 대한 훨씬 더 급진적인 개념으로, 인식을 뛰어넘는 일종의 사랑이다. 네가레스타니는 이것을 "얼굴 없는 사랑"[각주:34]이라고 부른다. 『사이클로노피디아』의 끝에서 파르사니가 "우리의 전염병을 합치고 사랑을 나누자"[각주:35]면서 여자 마법사를 부를 때, 이 사랑 나눔은 딘의 콘돔 없는 섹스와 공명하는 것 같다. 거기엔 이러한 개방성을 사전에 공급하기로 한 결정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콘돔 없는 섹스와 비슷한 이 만남에는 여전히 해석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이건 사랑인가, 섹스인가, 둘 다인가, 아니면 뭔가 다른 게 더 있을까? 어떤 물질이 교환되고 변형되고 있는가? 이러한 만남이 일어나는 동안 상상하거나 인식할 수 없는 것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아마도 사랑을 나누고 콘돔 없이 섹스하는 것이 급진적인 개방성의 순간일 것이다.

퀴어 이론은 그러한 다중정치적인 사랑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 이것은 얼마나 개방해야만 할까? 나는 퀴어 이론이 정점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물질성과의 관계도 생각하고 싶다면 이러한 다중정치적인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벌랜트는 우리에게 변형능력이 있는 퀴어적 사랑을 주었지만, 인간 주체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사랑이 건드리지 않는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운 무언가가 있다. 이 다중정치적인 사랑은 퀴어 역사에 존재한다. 우리는 HIV/AIDS와 같은 다양한 형태로 그것을 보아왔다. 이것은 사건들에 다중정치적인 예리함 없이 참석하는 퀴어 이론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퀴어성은 바깥을 여러 번 유혹하는 어떤 것이다. 이런 걸 설명하고 말하고 생각하는 게 느리거나 늦은 퀴어 이론이다. 퀴어 이론은 퀴어한 생활 방식을 충실하게 유지해왔지만, 다중정치적인 것들에 퀴어 이론을 개방하는 것은 퀴어성의 개방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러한 충실도를 강화시킬 수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얼굴 없는 사랑을 시도하는 퀴어 이론을 가질 수 있을까? 아니면 이 퀴어 이론을 다른 무언가로, 알아볼 수 없는 무언가로, 우리가 퀴어 이론의 이름을 짓기를 주저하는 무언가로 개방하는가?

퀴어 이론 개방의 다음 단계는 『사이클로노피디아』에 요약된 분열전략을 통해 퀴어 다중정치 같은 것에 도달하려고 네가레스타니가 발굴한 퀴어성을 급진적 개방성에 적합한 퀴어 이론을 다루는 데 적용하고 사용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우리에게 퀴어 이론을 외부를 향하는 더 정확한 목표, 더 좋은 식사로 만들기 쉽게 할 것이다.

 

각주

  1. David Ruffolo, 『Post-Queer Politics』 (Surrey: Ashgate, 2009): 1 [본문으로]
  2. David Eng, Jack Halberstam, and José Muñoz, 「Introduction」, 『Social Text 23』 (2005): 1를 보라 [본문으로]
  3. Anamarie Jagose, 「Feminism’s Queer Theory」, 『Feminism & Psychology 19』 (2009): 157-74를 보라 [본문으로]
  4. Elizabeth Grosz, 「The Future of Feminist Theory: Dreams for New Knowledges」, 2007 (미출간). [현재 Elizabeth Grosz, 『Becoming Undone- Darwinian Reflections on Life, Politics, and Art』(Duke University Press, 2011)의 한 챕터로 출간되었다.-역자주] [본문으로]
  5. Timothy Morton, “Queer Ecology,” PMLA 125 (2010): 273-82를 보라 [본문으로]
  6.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 작자미상의 자료들을 엮음』(윤원화 옮김, 미디어버스, 2021), 254쪽 [본문으로]
  7. 게일 루빈. 『일탈: 게일 루빈 선집』(임옥희, 조혜영, 신혜수, 허윤 옮김, 현실문화, 2015), 326쪽 [본문으로]
  8. 『사이클로노피디아』에는 사랑과 섹스 사이가 흐릿하고 혼동되어 있다. 추후 간단히 설명하겠다. [본문으로]
  9. Michael O’Rourke, 「‘Girls Welcome!!!’ Speculative Realism, Object Oriented Ontology and Queer Theory」, 『Speculations 2』 (2011): 275-312. [본문으로]
  10.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111쪽 [본문으로]
  11.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83쪽 [본문으로]
  12.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98쪽 [본문으로]
  13.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91쪽 [본문으로]
  14.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111쪽 [본문으로]
  15.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270쪽 [본문으로]
  16.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65쪽 [본문으로]
  17.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273쪽 [본문으로]
  18. Lee Edelman의 『No Future: Queer Theory and the Death Drive』 (Durham: Duke University Press, 2004)와 Jack Halberstam의 「The Anti-Social Turn in Queer Theory」 Graduate Journal of Social Science 5 (2008): 140-56를 보라. [본문으로]
  19. Reza Negarestani, 「Undercover Softness: An Introduction to the Politics and Architecture of Decay」 Collapse 4 (2010): 381. [본문으로]
  20.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275쪽 [본문으로]
  21.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271쪽 [본문으로]
  22. Negarestani, 「Undercover Softness」, 385 [본문으로]
  23. Negarestani, 「Undercover Softness」, 381 [본문으로]
  24. Negarestani, 「Undercover Softness」, 381 [본문으로]
  25.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323쪽 [본문으로]
  26.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144쪽 [본문으로]
  27.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144쪽 [본문으로]
  28.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144쪽 [본문으로]
  29.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295쪽 [본문으로]
  30. Lauren Berlant, 「Love, A Queer Feeling」, 『Homosexuality and Psychoanalysis』(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1), 444. [본문으로]
  31. Tim Dean, 『Unlimited Intimacy: Reflections on the Subculture of Barebacking』(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9), 47. [본문으로]
  32.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79쪽 [본문으로]
  33.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109쪽 [본문으로]
  34.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305쪽 [본문으로]
  35. 레자 네가레스타니. 『사이클로노피디아』, 324쪽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