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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거시 러셀. <디지털 이원론과 글리치 페미니즘 선언>

알려두기

1. 이 글의 원문은 Legacy Russell의 <Digital Dualism And The Glitch Feminism Manifesto>입니다.

2. 나원영 님이 번역한 FLORENCE SMITH NICHOLLS의 <글리치를 불태워라? : 디지털 퀴어에 대한 고고학>에서 이 글을 처음 발견했습니다.

3. 레거시 러셀은 2020년에 <Glitch Feminism: A Menifesto>라는 책을 출간했습니다.

4. 번역에 대한 피드백은 댓글에 남겨주시기 바랍니다.

 

 

레거시 러셀이 2012년 10월 10일에 기고함

이 글은 포르노 스타 제임스 딘에 관한 것이어야 했다.

여기저기 온 사방에서 딘에 관해 읽고 난 후, 나는 아마도 뭔가 글로 쓸 만한 게 있다고 생각했다. 다만 문제는 그의 작품을 보면 볼수록 그에 관해 쓰고 싶은 욕구가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핵심은 딘 자신도 아니고 또 어떻게 그가 호의적인 평가의 순환을 통해 온라인의 여성 관객들에게 칭찬받았는지도 아니다. 글로 쓰여야 할 것은 한 여성이 앉아서 컴퓨터 스크린이라는 매체를 통해 성관계-특히 그녀 개인의 섹슈얼리티와 자유에 대한 탐구와 관련 있는 그녀 자신만의-를 맺고 있을 때 무엇이 일어나는가이다.

소녀들이 ‘비평’을 전면에 내세워 볼 수 있는 딘 비디오만 너무 많다. 특정한 지점에서 보면 두 가지 중 하나가 그 과정을 방해한다. 첫 번째는 옴짝달싹할 수 없고 너무 많은 창이 열려 있는 바람에 압도되었으며 너무 많은 게 한 번에 재생되는 스크린이다. 나는 교육 받으려고, 나 자신을 위한 결정을 하려고 노력하며, 그래서 모든 것을 보고 싶고, 모든 것을 듣고 싶다, 지금 당장, 한 번에. 두 번째 방해는 당신이 추측할 수 있게 남겨둘 것이다. 나는 육체적 자아의 오르가즘(petite morte)이 디지털 ‘글리치’-작은 디지털 죽음, 색색거림, 변화, 호흡, 재채기, 일시 정지-라는 은유에 쉽게 반영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후자를 암시하겠다. 글리치. 나는 그곳으로부터 글을 쓰고 있다. 그 글리치에서 말이다. 유르겐슨의 디지털 이원론의 이원성 두 측면을 구성하는 AFK('키보드에서 떠난 혹은 자리 비운Away From Keyboard')와 IRL('현실에서는In Real Life')의 신화가 붕괴되는 온라인상 성적 행위에 참가하는 순간, 그 붕괴 속에서 그들의 눈부신 잠재성을 깨닫는다.

크리스 바라뉴크의 <피드백, 화이트 노이즈 그리고 글리치들: 사이버스페이스가 반격하다>에서 바라뉴크는 “글리치들, 피드백, 화이트 노이즈, 간섭, 잡음은 비록 이것들이 최종적인 경계는 아닐 수 있어도 현재로서는 명백히 경계”라고 관찰하며, 더 나아가 “…글리치들은…우리가 스크린에서 보는 것이 물리적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종류의 엔트로피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상기켜준다…”고 쓴다. 이런 종류의 방해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 우리의 파트너, 우리 주변의 세계와 신체적으로 접촉하기를 선택하는데 이러한 일시 정지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과 함께 우리 자신을 위해 선언해야 할 긴급함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글리치는 기계가 한숨을 쉬고 몸서리치며 홱 하고 경련을 일으키는 디지털 오르가즘이다. 이 순간들은 우리 자신의 육체적 행동의 의례와 루틴에 통합되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몸과 상호작용하는 방법 그리고 이러한 기계화된 미세 발작들에 의해 촉발된 우리의 가장 깊은 환상과 욕망을 탐구하는 방법에 영향을 미친다. 글리치는 촉매이지 오류가 아니다. 글리치는 행복한 사고(accident)다. 컴퓨터가 대화 도중에 멈출 때, 비디오가 버퍼링에 걸리며 재생을 거부할 때 이러한 순간들은 전희의 새로운 양태이며, 페티시가 아니라 어쩌면 성적 일상 속의 전희를 위한 새로운 어떤 것으로 인식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한다. 그리고 우리가 접근을 목표로 하는 물질이 무엇이든, 글리치는 우리가 그것을 기다리고 낑낑거리게 만든다.

확실히 디지털 이원론의 IRL은 AFK라는 거짓과 나란히 있다. 하나의 연속적인 자아가 아니라 일상생활과 인간 존재의 끊임없는 서사 속에서 활기찬 방정식의 양쪽이 함께 순환하던, 서로 격리된 상태에서 작동하는 두 개의 자아가 어떻게든 존재한다는 빠르게 쇠락하는 개념 말이다. 글리치는 차이를 분열시킨다. 그것은 둘 사이를 통과하는 판자다. 온라인에서 미디어를 볼 때, 그것은 무지갯빛으로 회전하는 커서, 픽셀화된 딸꾹질, 멈춘 스크린 혹은 버퍼링 표시로서 갈라진 틈의 역할을 맡아 우리가 온라인상의 성적인 활동에 참여할 때 스스로를 환상 속에 몰두하게 만드는 몸으로부터 우리의 육체적 자아가 분리되어 있음을 인식하도록 신경을 건드린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의 모험을 선택하라’고, 스토리를 마무리하라고 촉구하는 글리치이기도 하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디지털 공간과 우리 사이의 화해가 실패할 때, 비록 잠깐이기는 하나 우리가 떠났던 바로 그 지점에서 혁명을 오프라인으로 계속 가져가지만 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인하게 해 디지털 이원론적 변증법의 오류를 보여준다. 우리는 재부팅할 것인가? 재시작할 것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결국 우리는 리본을 달고 깔끔하게 만들어 향유의 최종 목표를 매듭짓기 위해 적절하다고 생각한 만큼 일을 마무리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것을 원하고 우리의 해방을 멈출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성적 활동’에 대해 전반을 아우르는 우산처럼 폭넓게 글 쓰고 있다. 나는 포르노를 보는 것뿐만 아니라 사이버링(cybering), 섹스팅, G-채팅 판타지 플레이 혹은 다른 성적 지향의 콘텐츠를 인터넷에 업로드하거나 다운로드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글리치가 기대를 고무시키는 것이다. 즉, 간섭의 황홀경이다. 프랑스어 번역의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차이’와 ‘지연’ 모두와 동일한 몰입적인 차연이다. 모든 것을 기술적 오류의 관점으로 너무 자주 경멸적으로 일축했지만, 나에게 글리치는 그것이 자신과의 혹은 가상화된 타자와의 ‘놀이’이든, 상상되거나 혹은 잘 알려진 스크린의 반대편에서 기다리든 전희의 영역의 연장을 의미한다.

이를 염두에 두고, 나는 ‘글리치 페미니즘’이라는 용어를 여기 이 페이지에 처음으로 사용하기 위해 내 손으로 직접 주조하며 새로운 급진주의의 전회를 요청하는데, 그것은 이 여정에서 키보드와 다리 사이에 똑같이 자신의 집을 찾은 것이다.

글리치라는 단어가 종종 슬랭의 영역에 위임된다는 점을 특기해야 한다. 이는 부정적인 의미로 고정하기 쉬운 이유를 설명해 준다. 어반 딕셔너리는 글리치를 “구조화된 시스템의 오류”로 정의하며, 딕셔너리닷컴은 “기계 또는 계획의 결함이나 오작동”으로 정의한다. 대중이 우리의 사회문화적 역학의 오류와 오작동에서 불편함이나 노골적인 두려움을 발견하도록 조건화하는 사회에서-이것은 불법적이고 암묵적으로 “배를 흔들지 마라!”는 에토스를 부추긴다-‘글리치’는 적절한 환유가 된다. 그러나 글리치 페미니즘은 ‘오류’의 인과관계를 포용하고 이미 경제적, 인종적, 사회적, 성적, 문화적 계층화로 인해 교란된 사회 시스템의 오류와 세계화의 제국주의적 철거공(wrecking-ball)-모든 신체에 계속해서 폭력을 가하는 과정들-은 전혀 오류가 아니라 오히려 절실히 필요한 정오표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함으로써 글리치의 우울한 함축적 의미를 시스템의 귀에 거슬리게 한다. 이 글리치는 ‘기계’에 대한 수정이며 결과적으로 긍정적인 일탈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이 글리치는 너무 오랫동안 여성으로 정체화된 몸을 소외시켰고 우리에게 파이 한 조각만을 주면서 우리의 만족을 가정하는 식으로 우리의 감성을 계속해서 해쳐온 가부장제의 허영과 상황이 주입된 ‘구조화된 시스템’의 헤게모니에서 벗어나기를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이 테이블에서 우리가 전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구분된 공간의 권력을 가진 수단이자 페미니스트의 정치적 행동을 통해 얻은 진보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진정한 ‘[우리]만의 방’인 영구적 자리를 우리 자신을 위해 주장하고자 한다.

글리치 페미니스트는 시각성의 가치와 여성 정체화하는 신체의 구성, 해체, 재-현을 확장하는데 디지털의 실천이 갖는 혁명적인 역할을 인정한다. 우리는 남성/여성의 만연하게 사회화된 구성화와 평행을 이루는 실제/가상의 이분법으로 작용하는 디지털 이원론의 엄격함이 폐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한다.

글리치는 자신의 어원을 이디시어 글리치glitch(“미끄러운 구간”) 혹은 어쩌면 독일어 글리첸glitschen(“미끄러지다, 슬라이드하다”)에서 찾는 것으로 추측된다. 자아의 영역을 가로질러 글리치가 그럴듯하게 만드는 것, 한계점에서 수영하는 것, 변-형하는 것이 미끄러움과 슬라이드이다. 디지털 격차는 젠더 격차와 같이 필연적인 자아 분열을 지향하는 팔루스로고스 중심주의와 규범적 시스템이 고착되게 허용하는 구조로서, 그러한 구조들은 어떠한 역할에서도 사실상 ‘중립적’이지도 자연적이지도 않다는 냉엄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그들의 자연화하는 중립성에 동의하도록 유혹해왔다. 몸으로서, 우리는 확장된 서사이고 우리의 지형에서 영원하며 예기치 않은 균열로 고취되어서 우리 자신을 재-현하게 하게 하고 또한 그렇게 하면서 새로운 빛과 탐험 속에서 우리 자신을 다시 보게 한다. 그러나 구조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틀림없이 연속적이다. 글리치 페미니즘은 성별적이지 않다. 이것은 관음증적인 주류 대중이 쉽게 소화, 생산, 포장, 분류할 수 있는 최종적으로 구체화된 정체성에 도달하기 전 어딘가에 존재하는 모든 몸을 위한 것이다.

따라서 글리치 페미니즘은 디지털 시대, 가상적 작인(virtual agency)의 도래, 특이성과 자아의 만발을 위한 페미니즘이다. ‘서브sub-’라는 접두사가 정전, 아카데미, 플라톤적 이상으로부터 배제되는 우리를 묵인하는 방식으로 표시되어야 하므로 ‘글리치’는 서브텍스트로 분류되기를 거부하며, 그것은 파괴 분자로 불리기를 거부하며, 그것은 주변적인 것 혹은 서발턴을 대변하지 않는다. 시스템을 전복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그 시스템이 제자리에 유지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글리치는 당신들 시스템 좆까! 당신네들 설명도 좆까고! 우리의 육체성에 부과하는 규정도 좆까라고 말한다. 글리치는 보편적 관례에서 차순위이기를 정중하게 거부한다.

유르겐슨의 디지털 이원론 문제화는 더 많은 담론과 발견의 문을 열어준다: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몸과 화려한 젠더의 난장에 참여하는 예술가들은 여전히 미술사의 계통 안에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다. 디지털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새로운 대중을 탐험하고 새로운 관객과 함께하는 비판적 담론에 참여할 수 있게 하며, 무엇보다 새로운 우리의 몸, 우리 자신의 개념 사이를 미끄러져(glitschen)가도록 허락하는 확실한 기반과 플랫폼을 주장했다.

갈 길이 멀고 우리는 아직 베타 버전이지만 필요한 ‘오작동’은 잘 진행되고 있다. 결과는? 아, 다행히 아직 버퍼링 중이다.

레거시 러셀(Legacy Russell)은 작가이자 예술가이며 큐레이터다. 밤 메거진(BOMB Magazine)의 밤블로그(BOMBLOG) 객원 편집자인 그녀는 브루스 하이 퀄리티 재단(The Bruce High Quality Foundation), 크레에이티브 타임(Creative Time), 브루클린 미술관, 휘트니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일하고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그녀의 글은 아트슬랜트(ArtSlant), 베르포리스(berforis), DIS, 캔틴(Canteen), 게르니카(Guernica)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골드스미스 대학 시각 문화에서 석사(MRes) 지원생인 그녀의 창조적이고 학문적인 작품은 공공 영역 내에서의 애도, 추모, 도상학, 숭배를 탐구한다. 그녀의 퍼포먼스 은 2012년 12월 뉴욕의 아트 앤 디자인(Museum of Arts and Design)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